[영화] 1987, 인간의 양면성과 존엄성에 대해 생각하다
1987, 인간의 양면성과 존엄성에 대해 생각하다
재작년에 박찬욱 감독의 아가씨(2016)를 재미나게 보고, 김태리 배우를 눈여겨 보았었다. 영화가 흥행하고 그가 유명세를 탄 후에 1987 이라는 영화에 캐스팅되었다는 기사 헤드라인을 읽고 내용이 무엇인진 모르지만 관람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물론, 그 후 시놉시스를 알고 나서 더더욱 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영화 1987은 1987년 1월 14일, 31년전 오늘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물고문을 받다 사망한 박종철 열사와 6월 항쟁에 이르기까지의 과정, 당시의 사회 분위기를 그려낸 작품이다. 처음 이 영화가 촬영을 시작할 때는 박근혜 정권이었기 때문에 개봉이 가능할지 불투명한 상황이었다고 한다. 그 과정에서 흔쾌히 출연하겠다고 한 주연급 배우들 덕에 무사히 진행이 되었고, 마침내 정권이 바뀐 2017년, 6월 항쟁 30주년에 맞춰 개봉을 하게 되었다.
배우들과 실존인물들의 뒷이야기
1987을 제대로 즐기는 방법은 캐스팅에 대해 하나도 모른 채로 예매해서 보는 것이다. 영화 곳곳에 익숙한 얼굴들이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벌써 관객 수가 500만이 넘었으니 아실 분들은 다 아실 것 같아서 몇몇 배우분들을 소개해본다. 반전 캐스팅과 30년 전 실존 인물들의 양면성을 알고 나면 여러가지를 생각하며 영화를 관람할 수 있을 것이다.
치안본부 대공수사처 처장 박처원 역할을 맡은 김윤석은 실제 박종철 열사의 고등학교 2년 후배이다. 1987 영화 촬영 초창기부터 합류했던 배우로, 1987년 학생 데모현장에도 참여를 했다고 한다. 예고편에서 나오다시피 작품에서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 라는 희대의 망언을 하는 인물이다. 빨갱이를 잡아 넣는다는 대공수사반이지만 이북 출신으로 사투리를 그대로 쓰고 있다. (당시 전라도 사람들은 차별 때문에 사투리를 고쳐가면서 사회 생활을 했었던 걸 생각해보면 참 아이러니하다.) 어린 시절 빨갱이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는 것으로 그려지는데 이 부분은 감독, 배우 모두 거짓말일 것으로 상상하며 연출했다고 한다. 김윤석 배우는 박처장의 몸집을 연기하기 위해 살도 찌우시고 하관을 넓히기 위해 마우스피스까지 착용하는 노력까지 하셨다.
전두환의 최측근으로 그려지는 장세동 안기부 부장은 문성근 배우가 연기한다. 문성근 배우는 민주당 최고위원을 거쳐 당대표까지 했던 이력이 있는 연예계 대표 민주당 지지자지만 이 영화에서 끝내주는 쓰레기 역할을 맡아 화제가 되었다(분량 자체는 매우 짧다). 또한 영화 마지막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면서 연설을 하는 분은 민주화 운동가 문익환 목사이신데, 이 분이 문성근 배우의 아버지다. 이런 분이 영화에선 전두환을 각하라고 지칭하며 권력의 졸개 노릇을 하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어떤 마음으로 이 영화에 참여했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다.
치안본부장 강민창 역할은 우현 배우가 담당했다. 우현 배우는 1987년 6월 항쟁의 피해자인 이한열 열사와 동문으로 최루탄 사망사건 항의 집회의 최전방에서 학생운동을 했던 것으로 유명하신 분. 이 영화에서는 역시 권력의 부역자로 의사 및 기자를 돈으로 구슬리며 사건을 무마하려고 한다. 박종철 열사의 사인에 관한 기자회견을 하며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 라는 발언을 발표하려다가 본인도 황당해서인지 마무리를 못하는 장면이 인상깊다. 우현 배우는 차마 그 말을 하기가 너무 힘들었다고 한다.
최환 검사를 맡은 하정우.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은폐하려고 하는 대공수사처 인물들에게 시신 보존 및 부검을 명령한 사람이다. 상사가 권력에 고개숙이려 할 때도 최소한의 양심으로 끝까지 자신의 정의를 관철한 사람이다. (영화 내에서 장인에 대한 말이 나오는데, 장인이 검찰총장과 법무부장관까지 하신 분이라고 한다) 시종일관 답답하고 안타까운 영화 내용에서 몇 안되게 속 시원한 장면을 표현해주는 인물이다. 실제로 최환 검사는 영화를 보고 "내가 저렇게 터프한 사람은 아닌데" 라고 했다고 한다. 최환 검사는 이 사건 이후 5.18 특수수사본부장을 맡아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 수사를 지휘한 후 구속까지 시켰다.
얼마 전 방영된 썰전에서 우상호 의원은 최환 검사가 당시 공안 검사로 민주화 투사들을 잡아 가두고 고문을 묵인했던 적이 있기 때문에 영화를 보는 내내 마음이 복잡했다고 한다. 역시 현실의 인물은 항상 선하고 정의롭기만 하지는 않다.
치안본부 대공수사처 경찰들. 남영동에서 박종철 열사를 고문하여 죽게 만든 장본인들이다. "받들겠습니다!" 라는 말로 (대체 뭘 받들겠다는 건지) 위에서 시키는 것은 뭐든지 다 한다. 이야기가 전개되는 것을 보고 있으면 어쩌면 이들도 권력의 피해자? 라는 생각을 하게 되지만, 어린 학생의 죽음을 방조하고, 민간인을 잡아다 고문하고, 유족들이 울부짖고 있는데 낄낄대며 검사들을 조롱하는 장면을 떠올려보면... 하지만 가족들을 사랑하는 면모나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서의 모습, 범인으로 잡혀들어가며 또다른 고문을 받는 장면에서는 마음이 싱숭생숭하다.
중앙일보와 동아일보 기자들 역시 사건 은폐를 파헤치기 위해 몸을 아끼지 않으며 취재를 한다. 어린 학생이 죽었는데 보도지침이 대수냐고 하는 기자, 최초보도를 한 기자에게 빨리 여관방에 숨어있으라고 알려주는 기자를 보면 답답한 군부독재 시절의 참언론인이란 저들이구나 싶다. 나에게는 조중동이라고 함께 묶이면서 항상 적폐언론으로 존재하고 있었는데 그 당시에는 진보언론이었다니 놀랍다. 그런데 지금은 왜 그래....? 영화를 보고 나서 박종철 열사 사건을 최초보도한 기자가 박근혜 정권 청와대 홍보특별보좌관으로 임명된 적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는데 굉장히 기분이 이상했다. 그 때의 열정은 어디 갔으며 지키고 싶었던 정의는 어떻게 바뀌었을까?
*기자 역할을 맡은 배우들 가운데 익숙한 얼굴이 많으니 관람하면서 찾아보면 재미있다.
블랙리스트 유망주(ㅋㅋ)이신 유해진 배우 역시 1987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으셨다. 결혼 못한 노총각(...) 교도관 한병용. 실제 인물인 한재동과 전병용 교도관을 합친 인물이라고 한다. 생긴 게 험상궂어서 매번 검문에 걸려 힘겨워하는 모습이 웃기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고....
영화 보이콧의 원인으로 논란이 되었던 안유 교도소 보안계장은 최민식 배우의 동생 최광일 배우가 연기하셨다. 안유 계장은 당시 민주투사를 고문하고 괴롭혔던 인물이기도 하다. 하지만 박종철 고문치사의 범인을 알리려고 노력한 것은 사실이고, 영화에서는 주로 그 부분에 대해 나오기 때문에 선하게 보이기도 한다. 피해자 분들이 이 영화를 보지 않겠다고 해도 납득이 갈 수밖에 없다. 또다시 인간이 인간에게 보일 수 있는 최소한의 양심, 선한 면과 악한 면의 양면성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
인상깊었던 장면들
박종철 열사와 가족들이 나오는 장면에서는 여러 번 봐도 눈물이 났다. 박종철 열사는 1964년 생으로 살아계시다면 현재 53세로 어머니 아버지 또래이다. 1987년이 그렇게 오래된 일이 아니라는 것이 체감된다. 아끼는 막내 아들이 죽었는데 손 한번 못잡아본 채 화장하고, 외진 강가에 가서 숨은 듯이 유골을 뿌리는 장면, 삼촌이 주검을 확인하는 장면, 경찰들에게 마치 범죄자처럼 연행되는 장면 모두 맘 편히 볼 수가 없다. 개인적으로는 4.16 가족들에게 이전 정권이 자행한 일들이 떠오르면서 더 슬펐다. 내가 어른이 되면 4.19, 5.18처럼 숫자 세 개가 뇌리 속에 콱 박힐 일이 없을 줄 알았는데...
김태리 배우가 맡은 연희 역은 대학교 새내기이다. 아버지가 노조 운동을 하며 알게 된 사람들과 술을 먹다가 사망했기 때문에 홀어머니 밑에서 삼촌과 함께 자랐다. 힘들게 자랐기 때문인지 군부 독재 치하에 "튀는 행동"을 하지 않으려 하는 모습이 주변 사람들이 안전하게 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보였다. 내가 저 시대를 살았다면 저런 모습이지 않았을까? 싶은 소시민 대표 주인공. (본인은 열받으면 분에 못 이겨 우는 성격이라 투쟁하러 나갔을지도 모르겠다) 대학 새내기답게 화장도 하고, 잘생긴 남학생에게 설레기도 하고, 가족을 생각하며 삼촌에게 잔소리를 하는 모습이 지금 대학생들이랑 하나도 다를 바 없다. 그런다고 뭐가 바뀌냐면서 운동권처럼 보이는 걸 싫어했던 그녀가 결국 거리로 나가 투쟁하게 되는 서사가 2016년 겨울의 촛불혁명이 떠오르면서 감동적이었다.
아 참, 잘생긴 남학생이 두건을 내려 얼굴을 보여주는 장면에서 관람객들이 다 호들갑을 떨어서 슬픈 와중에도 웃겼다. 두 번 봤는데 두 번 다 그랬다. ㅋㅋㅋㅋ 이건 불가항력...
영화를 통해 김정남이라는 잘 알려지지 않은 민주화 투사에 대해 알게 된 것도 감사드린다. 비록 배우는 마음에 안들지만 그가 추격전을 벌이는 장면의 연출은 아주 가슴 졸이면서 보았다. 무대 배경으로 절, 교회, 성당이 다양하게 나오는 장면도 좋았다. 당시 시대상 앞에서 종교인들이 하나되어 진실과 정의를 위해 싸우는 모습이 뭉클했다.
개인적으로 영화 1987은 완성도가 아주 높은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실존인물들이 제각기 맡은 곳에서 최소한의 양심을 지켜냄으로써 이루어진 일을 검사, 경찰, 의사, 운동권 인사, 학생 모든 역할을 과하지 않게, 적지도 않게 배치하여 이야기가 진행된다. 그 해에 있었던 현대사는 다 아는 내용인데도 불구하고 가슴이 두근두근 떨린다. 보는 내내 한숨도 얼마나 쉬었는지...
연희의 초반 캐릭터성과 여성 캐릭터가 별로 없다는 것 때문에 1987이 여성을 지운 영화, 여혐영화라는 논란이 잠깐 있었지만 개인적으로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본인은 여혐 영화에 아주 예민함) 장준환 감독이 아내인 문소리 배우에게 여러 조언을 받아서 그런지, 영화를 보고 있으면 곳곳에 학생 운동을 하는 여성들도 보이고, 불필요하게 여성을 함부로 다루는 모습도 나오지 않았다. 그 당시 이 사건에 얽혀 있던 인물들이 전부 남성이었기에 남성의 비중이 높은 것뿐, 만일 어거지로 남성을 여성 캐릭터로 바꾸었다면 오히려 역사 왜곡으로 논란이 됐을지도 모른다. 또한 연희가 시민을 대표하는 캐릭터성을 가진 주인공이기 때문에 여성 배제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손꼽고 싶은 장면, 말하고 싶은 장면이 너무 많아서 리뷰 글이 너무 길어졌지만 남은 부분은 직접 관람하는 것을 추천한다. 개봉 초반에 예매율이 적어서 안타까웠는데 오늘 기준으로 누적 관객이 540만 가까이 되었다. 어서 천만 관객이 넘었으면 좋겠다!
감독 | 장준환
개봉 날짜 | 2017.12.27
출연진 | 김윤석, 하정우, 유해진, 김태리, 박희순, 이희준
1차 관람일 2018.01.07
2차 관람일 2018.01.13 (대전 CGV 무대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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