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진 :: 다산 정약용의 유배시절 첫번째 거처 사의재(四宜齋)


지난 글 : 2017/10/27 - [발자취 足跡/한국 大韓民國] - 강진 :: 하멜의 돌담길, 담쟁이 덩굴 가득 쓸쓸한 전라병영성



전라병영성을 둘러보고 나서 향한 곳은 사의재라는 곳이다. 강진은 다산 정약용이 1801년 유배를 와서 18년이라는 세월을 지낸 곳이다. 그만큼 강진 지역 곳곳에 다산 선생의 흔적이 남아있는 유적지가 많다. 이 사의재는 처음 정약용이 유배를 왔을 때 4년 동안 지낸 곳이라고 한다.




2006년부터 복원이 시작되어 지금의 사의재 건물들은 완공된 상태지만, 더 멋진 관광명소를 만들기 위해 2018년까지 공사를 할 예정이라고 한다. 차로 찾아간 이 곳 부지는 상당히 건물 간 사이가 좁고 골목길이 많아서 바뀌면 어떻게 될 지 기대가 된다.




복원이 다 되지 않았어도 사의재 주변에는 이렇게 갈 곳이 많다. 강진 정말 볼 게 많은 곳이다!




정약용 남도유배길을 따라 관광하는 코스가 있다. 아니 저기... 유배당하는 심정을 느끼고 싶지는 않은데...




사의재(四宜齋)는 다산 정약용이 1801년 강진에 유배 와서 처음 묵은 곳이다. 사의재는 이곳 주막집(동문매반가) 주인 할머니의 배려로 골방 하나를 거처로 삼은 다산이 몸과 마음을 새롭게 다잡아 교육과 학문연구에 헌신키로 다짐하면서 붙인 이름으로 "네가지를 올바로하는 이가 거처하는 집"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사(思) 생각을 맑게 하되 더욱 맑게, 모(貌) 용모를 단정히 하되 더욱 단정히, 언(言) 말(언어)을 적게 하되 더욱 적게, 동(動) 행동을 무겁게 하되 더욱 무겁게」

이 네 가지를 바로하도록 자신을 경계하였던 것이다. 사의재는 창조와 희망의 공간이다. 사려깊은 주막 할머니의 "어찌 그냥 헛되이 사시려 하는가? 제자라도 가르쳐야 하지 않겠는가?"라는 얘기에 자신 스스로 편찬한 「아학편」을 주교재로 교육을 베풀고, 「경세유표」와 「애절양」 등을 이곳에서 집필하었다. 다산은 주막 할머니와 그 외동딸의 보살핌을 받으며 1801년 겨울부터 1805년 겨울까지 이곳에 머물렀다.

- 사의재한옥체험관 홈페이지




들어가기 전 전경. 풀이 우거져 있는 게 어쩐지 아지트 같다.




싸리문과 초가집




쫌 마음에 드는 사진




사의재 바깥 쪽의 길거리는 사람이 많이 다니지 않고 좀 썰렁하다.




이 곳에서 다산 선생은 제자 6명을 가르치셨다고...




사의재 바로 앞에 주막이 있다. 주막의 주인 할머니가 사의재를 탄생시킨 일화 그대로, 같은 부지 안에 있다. 공부하다가 출출하면 나와서 뭐 먹기 딱 좋았을 거 같다.

시골 마을의 주막_할머니가_마치_은둔고수같은_느낌_jpg 정말 멋지시다.


다산선생이 강진에 유배왔을 당시 사람들이 꺼려하여 거처를 마련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 때 동문 밖 동문매반가에서 밥을 팔던 노파가 이를 불쌍히 여겨 방을 내주었다. 거처하는 동안 날마다 들창문을 걸어 잠궈 놓고 밤과 낮을 홀로 우두커니 앉아 실의에 빠져 지낸 다산선생께 사려 깊은 노파는 다산선생을 깨우쳐주면서 학문을 다시 할 수 있게 한다.


“ 령 공(종2품 존대말)은 글을 읽었으니 이 뜻을 아시는지요? 부모의 은혜는 다 같은데 어머니의 수고가 더 많습니다. 그런데 성인은 사람을 교육시키고 감화시키는 일들을 이룩하게 하면서 아버지만 소중히 여기게 하고 어머니는 가볍게 여기며 성씨는 아버지를 따르게 하고 사람이 죽었을 때 성긴 마포 베로 만들어 입는 옷인 상복도 어머니는 낮췄고 아버지 쪽의 친족은 일가(一家)를 이루게 하면서 어머니 쪽의 친족은 안중에 두지 않고 무시하였으니 이 일은 너무 치우친 것이 아닌가요?”라고 물었다.


이에 다산선생께서는 “아버지께서 나를 낳으셨기 때문에 옛날의 책에도 아버지는 자기를 낳아준 시초라고 하였소, 어머니의 은혜가 비록 깊기는 하지만 하늘이 만물을 내는 것과 같은 큰 은혜를 더 소중하게 여긴 때문인 것 같아서.” 라고 대답했다.


그랬더니 할머니께서는 “령 공의 대답은 흡족하지 않습니다. 내가 그 뜻을 생각해보니 풀과 나무에 비교하면 아버지는 종자요. 어머니는 토양이라 합니다. 종자를 땅에다 뿌려 놓으면 지극히 보잘 것 없지만 토양이 길러내는 그 공은 매우 큽니다. 밤톨은 밤이 되고 벼의 씨앗은 벼가 되듯이 그 몸을 온전하게 이루어 내는 것은 모두 토양의 기운이긴 하지만은 끝내는 같은 동아리로 나뉘어 지는 것은 모두가 종자에서 연유한 것 같습니다. 옛 성인들이 교육하고 감화시키는 일들을 수립하고 예의를 제정하게 된 근본은 아마도 이것에 연유한 것 같습니다.” 라고 하면서,


“어찌 그냥 헛되이 사시려 하는가? 제자라도 기르셔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한다.


이 얘기에 자신을 새로 추스린 다산선생은 스스로 편찬한「아학편」을 주교재로 교육을 베풀었으니 당대 최고 권위의 학당이 이곳에 창설된 셈이다.




동문주막에서는 실제로 음식을 판매한다. 우리가 갔을 때는 손님이 없었고, 안쪽까지 가지 않았더니 주막 주인의 얼굴도 보지 못했다. 어쩐지 동네 사람들이 와서 여기 파전 하나 막걸리 하나 주쇼- 할 것 같은 분위기.



엄마를 기념사진 찰칵




엄마가 (모드를 잘못 설정해놓고) 찍어주심

아무리 봐도 공부하러 온 복장은 아니로구나!




실제 건물은 아니고 복원한 건물이지만 정겹고 아늑하다.

마루에는 방명록이 놓여있다.




정약용 선생님의 가르침을 받아간다.



사의재 건물 뒤쪽으로 가보면 한옥체험관이 있다.




사의재 한옥체험관은 3개동으로 건축면적 139.14㎡이며, 추후 사의재 한옥체험관 내 다산체험 및 한옥체험 프로그램 등을 운영할 예정이다. 사의재 한옥체험관은 대지면적 328㎡에 안채 1동과 사랑채 2동으로 조성했다. 사의재가 전통주막으로써의 음식과 숙박제공이라는 본래의 특성 중 숙박기능이 없는 것을 보완하기 위해 한옥체험관을 조성하게 되었다. 한옥 특유의 고즈넉함과 멋을 살린 공간에서 추후 온돌 체험, 다산 체험프로그램, 전통 다도체험 등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을 체험할 수 있는 장소로 탈바꿈돼 또 하나의 명물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아직 완벽하게 조성된 것은 아니어도, 분위기는 나름 좋았다.





유배지에서 상실감과 좌절감을 느꼈을 정약용 선생을 다시금 희망에 차게 한 곳.

처음 유배 온 1년 간은 아무것도 안하고 세월을 보냈다는데... 하긴 엘리트 중 엘리트였는데 기약없는 유배생활을 해야했으니 얼마나 좌절했을까.

이 곳에서 주인 할머니의 도움을 받고 점차 주위의 따스함과 소박한 일상의 소중함을 느끼며 살아갈 힘을 얻었을 거라고 생각해본다. 




사의재 앞에는 자그마한 연못, 동천정이 있다. 공부하다가 머리 아프면 앞마당에 나와서 숨 좀 돌려야지.




동천정으로 이어지는 자그마한 다리




연못에는 연잎과 그득했고, 군데군데 연꽃이 피어있었다.

멀리 보이는 수련까지... 녹음을 조성하려고 애쓴 흔적들.




사의재 앞에 있던 오래된 샘터도 몇 장 찍어보았다.



다산 정약용 선생에게 큰 의미가 있었을 사의재. 강진 여행에서 반드시 방문해야할 곳으로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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